2014년 3월 31일 월요일

[NOAH_노아] 영화 리뷰 (스포 잔뜩!)






   오늘의 포스팅은 최근 나름대로 HOT한 영화 노아에 대한 나름대로 해석과 리뷰입니다.
(스포 가득합니다. 주의하세요.) 
글쟁이는 사실 이 영화 괜찮은 것 같은데, 글쟁이의 SNS에는 이 영화에 대한 포스팅이 다양한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참고로 글쟁이는 기독교인임을 밝혀둡니다.)

    일단 감독 및 출연진을 살펴보자. 


 감  독

 

 





출연진

헐...러셀 크로보다 엠마 왓슨이 먼저 있다..니..(이 정보는 구글정보입니다. 녀석들..ㅋ..ㅋㅋ..)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들 알듯이 신께서 인간의 죄악을 보고 한탄하여 노아에게 인류 멸망의 환상을 노아에게 보여준다.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 신의 계시를 받은 유일한 인물은 노아이다. 그는 대홍수로부터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거대한 방주를 짓기 시작한다. 방주에 탈 수 있는 이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의 암수 한 쌍과 노아의 가족들 뿐.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를 조롱하고 가족들간의 의견 대립마저 생겨나는데.. 세상을 집어삼킬 대홍수의 시작과 동시에 그 모든 점들은 모여 방주에서 부딪히기 시작한다.

   성경을 판타지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면 판타지로 재구성한 이 영화는 꽤나 흥미로운 주제들을 가지고 있다. 

   최근 뜨거운 노아의 쟁점들을 살펴보면 

1. 인간을 돕는 Watcher의 존재
2. 창조주(CREATOR)의 무자비함 
3. 뱀
4. 뱀껍질을 팔에 두르는 행위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 Watcher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출처 : http://www.comicbookmovie.com/fansites/nailbiter111/news/?a=97077)


   영화의 스토리상 Watcher들은 하늘에 있다가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를 돕기 위해 하늘에서 오게 된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타락천사인 루시퍼와 그 일당 즉 사단의 무리라고 볼 수 있다. 일단 영화 내에서는 그런 이들이 인류의 문명을 돕기 위해서 스스로 오게 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감독이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결과를 놓고서 본다면 결국 이들도 창조주로부터 버림받고 저주받은 존재로서 빛이 아니라 암석이 된다. 이들은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결국 이들이 알려준 문명은 결국 자연을 파괴하고 도움을 준 자신들마저 인류에게 버림받고 쫓겨나는 것을 영화 내에서 볼 수 있다. 즉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이들도 결국 창조주의 질서를 지켜내지 못하는 존재이다. 더 나아가 이들도 창조주와의 소통이 끊긴 상태에서는 결국 인간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 못한다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이것이 글쟁이가 Watcher을 보면서 느낀 영화 내에 흐르는 줄기였다. 
   Watcher들의 마지막은 결국 신의 뜻을 따르려 노아를 돕다 마지막을 맞이하는데 이 때 하늘로 올라가는데 아마 자신을 내어 주면서 신의 의지를 지키려는 그 의지가 이들을 구원하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2. 창조주(CREATOR)의 무자비함
    













   창조주의 무자비함을 말하기 이전에 여기에는 창조주와 두발가인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차이점을 살펴야 한다고 본다. 먼저 노아라는 영화는 감독의 인터뷰(참고 : http://www.huffingtonpost.kr/2014/03/26/story_n_5032198.html?utm_hp_ref=fb&ir=Korea&src=sp&comm_ref=false)에서도 볼 수 있지만 구할 수 있는 많은 자료를 참고하여 만들어진 영화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간의 심판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영화 내의 두발가인의 대사가 인간의 죄를 가장 잘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두발가인은 영화에서 "나도 이들에게 삶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한다"고 말하며 "나와 그는 같다"고 말한다. 즉 두발가인 = 인류의 왕이라는 공식에서 더 나아가 인류의 왕 = 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가 심판 당하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글쟁이는 여기에서 감독이 참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두발가인의 저 두 대사는 신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돌아서는 르네상스 (Renaissance)를 시작으로 지난 20세기까지의 인류의 경험과 이성으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정신을 대표하며 또한 현대에 이르러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착취하려는 이기성까지도 .. 이것을 정당화 하는 두발가인의 대사가 있다. "신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두발가인은 정확하게 인류가 20세기까지 자행했던 행위들 또는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자행되어 오는 자연에 대한 착취에 대한 거울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가 걷는 황폐한 땅이 바로 두발가인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에게 신의 심판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야말로 잔혹한 것이다. 에덴에서 쫓겨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에 따라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심판이라니..그러나 다시 아까의 이유가 두발가인의 발목을 잡는다. 바로 신과 같이 되어버리려는 그의 욕심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목을 죄여 온다. 이제 신이 원망스러운 것이다. "나와는 왜 대화를 하지 않습니까?" 라는 말에 두발가인은 물론 오늘날 고통을 겪는 수많은 이들은 궁금해 한다. 그에게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창조주의 공의라는 성격이 여기에서 등장한다. 선과 악에 대한 공평한 하나님의 품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 화룡정점을 찍는 부분이 바로 노아 자신을 비록한 인류의 멸망이다. 즉 창조주의 잔인하고 무자비함을 불러온 것이 인간이며 그 결과 인간만 지구에서 사라지면 된다는 것이 노아의 결단이며 신의 의지인 것이다. 아주 쉽게 도출 가능한 결론 아닌가?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 말이다.
   지금 기억이 나질 않는데, 미국의 스탠딩 코미디언이 말했던 것 같다. 지구가 플라스틱 때문에 멸망할 거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지구는 멸망하지 않고 플라스틱 행성이 될 뿐이며, 인간만 사라질 것이라고 비꼰 것과 비슷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신의 무자비함이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감수하더라도 우리를 감싸주며 우리와 계속해서 대화해야 하지 않느냐는 두발가인의 외침과 같을 뿐이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를 물어야 하는게 맞다고 본다.

   왜 인류는 여기까지 오게되었는가? 바로 '욕심' 때문이라고 글쟁이는 생각한다.



3. 뱀




   뱀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빨리 넘겨버리고 싶은 파트이다. 글쟁이도 뱀은 별로 좋아하질 못하다....ㅠㅠ

   뱀이 많이 나온다고 몇 유치한 일루미나티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음모론 가득한 글이 많이 보인다. 그냥 사진으로 대답을 대체한다.





동물




동물 2


   동물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데 대체 뱀 종류는 한 가지일 것이란 생각을 하는지 당최 이해가 안 된다.






4. 뱀껍질을 팔에 두르는 행위
   하아 이것도 말이 참 많았다. 일단 감독의 설을 듣자. 



창조주가 아담에게 준 것은 본래의 선함이 있는 뱀의 껍질이며, 선함을 벗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자 에덴동산 밖의 영혼의 냉혹함으로부터 아담의 후손을 지켜주는 에덴동산의 신성한 조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즉 허물은 ‘선’을 뜻하며 뱀은 이 허물(선)을 버리며 악한 존재를 드러내는 데, 인간들은 선함을 벗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뱀 허물을 팔에 두른 것이었다.(http://www.widecoverage.co.kr/news/article.html?no=18145)




요 장면 기억하는가? 껍대기 벗는 글쟁이도 여기서 노아의 팔에 있는 것은 분명 저 첫번째 허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이다!!)
   또한 영화에서 뱀이 허물을 벗는 모습이 여러 번 그려지는 데 이는 본래 창조주가 만든 선한 뱀이 선함을 벗고 그 안에 숨어있는 악함을 드러내는 것을 강조한 장면이라고.한다.(http://www.widecoverage.co.kr/news/article.html?no=18145) 캬 글쟁이는 영화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사실 글쟁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어거스틴의 원복인 개념때문이었다. 즉 창조의 선함 원래 모든 것은 선하게 지어진 것이라는 개념이 여기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녹색의 뱀이 껍질을 벗으며 시커멓게 변한다. 눈의 색도 붉은 색으로 변하게 된다. 사실 인터뷰에서 감독은 제작진은 창세기 3장 21절에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둘에게 (동물의) 껍질로 만들어진 옷을 주셨다는 데서 고민이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 있는 수많은 동물 중 유일하게 죽이지 않고 껍질(허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뱀 껍질이라는 결론을 얻었다.(http://www.widecoverage.co.kr/news/article.html?no=18145)고 하지만 

   글쟁이는 사실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를 기억하기 위해 사용한 장치로 영화를 보았다. 팔에 두르고 그 창조의 선함의 상태를 기억하고 그것을 이어나가는 것이 바로 뱀껍질이 가진 의미 아니었을까? 여기에 제작진의 인터뷰 내용을 덧붙이면 아무것도 죽이지 않고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도 뱀껍질이긴 하다. 

   (사실 뱀껍질을 굳이 사용해야 했을까? 라는 궁금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글쟁이가 쓰고 싶은 것들을 써보도록 하겠다. 


글쟁이의 포인트 1. 노아의 내적 갈등




   가장 먼저는 노아가 가진 내적 갈등이다. 공의와 은혜라는 것의 사이에 노아는 위태하게 서 있다. 하나님이라는 노아의 정의 그리고 그 정의 앞에 죽어야 할 인간들 특히 노아의 가족들 (모든 인류가 심판의 원인임을 알고 그 자신은 물론 가족들 마저도 심판의 대상으로 여겼던 노아)을 바라보아야 한다. 노아는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게 된다. 사실 교회를 다니는 이들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중에 나만 밥먹기 전에 기도해도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노아의 가족은 모두가 하나님을 따르지만 노아는 당대의 선한 자이다. 노아도 스스로 밝힌다.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 받은 것이다."라고 정의와 사랑이라는 가치가 노아의 내부에서 노아의 가족 내부에서 충돌하기 시작한다. 사실 화해하기 가장 어려운 가치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장발장에서 장발장과 자베르가 가진 가치가 이 사랑과 정의라고 본다면 이 둘은 정말 화해하기 어려운 것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자베르는 정의를 따르고 장발장은 사랑을 따른다고 본다. 정의를 따르는 이들에게 사랑은 불필요한 절차이다. 정의 이름으로 심판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무조건 심판하기 보다는 그를 회유하여 돌이키도록 만든다. 장발장에게 사랑의 은혜를 입은 자베르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지 않는가? 

   노아는 그 두 가지 가치 속에서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노아는 사랑을 선택한다. 필자는 이 부분이 감독이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일라가 노아에게 말한다. 창조주는 당신이 자비를 선택할 것이라고 알았기에 당신을 선택한 것이라고... 
   칼빈의 예정론이 아닌 웨슬리 전통의 감리교인인 글쟁이는 이 부분이 너무나 좋고 좋았다. 인간은 자비를 선택할 수 있고 인류는 나아갈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 창조주의 의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참 좋았다. 


   글쟁이의 포인트 2. 함의 두 번의 배신





   사실 글쟁이는 함의 두 번의 배신을 통해서 글쟁이는 인류를 보았다. 두발가인에게 붙었다가 결국 두발가인을 다시 배신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즉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으며 인간의 능력을 믿었던 두발가인과 창조주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는 노아 사이에서 함은 갈등하는 존재로 글쟁이에겐 비춰졌다. 

   이 글쟁이의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함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 영화에서 글쟁이와 공명했던 인물은 바로 함이었습니다. 함은 호기심 많고 자신의 짝이 없음에 따지기도 한다. *(글쟁이도...ㅠㅠ따져야 쓰것습니다. ! 왜죠!? 다 짝이 있다던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어느새 와르르 무너저 내리는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신에게 기대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신에게 기대었던 어제가 어디 갔는지 다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기도 한다. 이것이 인류가 가진 솔직한 본성 아닐까? 함의 두 번의 배신은 인간과 신 사이에 연약한 현재 인류가 가진 모습을 대표한다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 함의 떠남은 오늘날 인류가 어디로 갈지 예상해봄직한 열린 결말 아닐까? 


- 무쪼록 지금까지 글쟁이는 마음대로 글을 써내려왔다. (사실 누가 읽기나 할까?) 뭐 맘에 안드는 부분이 많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뭐 블로그에 있는 글 읽어달라고 한 적 없으니 너무 상심해 마시고 세상에 일도 많고 탈도 많고 글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많으니 다들 생각하시길 !!

   Do Think everyone 

   이상으로 노아 해석 및 리뷰를 마침니다. 










_Aim High 사색하는 글쟁이 
_2014.03.31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A.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독서노트



대한민국 2011년 올해의 사자성어가 발표되었다.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뜻의 ‘엄이도종’(掩耳盜鐘)이 2011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로 선정됐다. 지난 17일 교수신문에서는 전국 각 대학 교수 304명을 대상으로 올해의 사자성어를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의 36.8%가 ‘엄이도종’을 꼽았다고 밝혔다.‘엄이도종’(가릴 엄, 귀 이, 훔칠 도, 쇠북 종)이란 ‘자기가 한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비난이나 비판을 듣기 싫어서 귀를 막지만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종을 훔치러 들어온 도둑이 종이 너무 커 쪼개려 하다 소리가 너무 클까 봐 자기 귀를 막았다는 춘추시대 일화에서 유래했다.
이런 !! 대한민국의 현실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학자들의 시선에 2011년은 소통이 안되는 무언가 가로막하 버린 현실이 보였는가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만 그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미국의 타임지 올해의 인물은 시위자로 선정되었다. 즉, 아래로부터의 어떤 움직임들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토크빌의 책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는 것은 민주주의의 수호자처럼 여겨지는 미국의 시작이 어떠했는가? 그 정신과 그 제도를 알아보기 아주 좋은 책이라 생각된다.


<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


토크빌이 미국에서 놀랍게 여긴 것은 바로 ‘평등의식’이다. 국민들 사이의 전반적인 생활상태의 평등이다. 토크빌은 이 평등이 모든 그의 연구의 원천적인 기초이며, 언제나 귀결되어지는 핵심임을 서론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평등의식으로부터 시작된 민주주의는 어떤 교정, 교육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토크빌 당시 어떤 국가도 민주주의를 통치에 적합하도록 하려는 시도는 없었으며 그것을 정부에서 배제하려는 노력만 했다. 그러나 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유익한 것으로 만드는데 꼭 필요한 법률, 사상, 관습 및 도덕에 있어서 동시적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 이 변화에 기저에 깔려있는 인식은 바로 평등이다. 그렇게 미국에서 정착된 제도와 법률 등등은 권력이 세분화 되어있으며, 권력은 국민에서 난다는 주권제민의식이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으나 은연중 많이 드러나 있다고 토크빌은 언급한다. 미국의 입법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공동사회에서 질서 있는 행동과 훌륭한 도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에 따른 혹독하고 억압적인 법률이 제정되는데 그것은 당국에 의한 강제적 성격이 아니라, 법률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투표로 채택여부를 결정했고 당시 공동사회의 관습이 법률보다 더욱 엄격하고 청교도적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공사에 대한 주민의 간여, 자유로운 선거에 의한 세금 결정, 권력을 대행하는 사람들의 책심성, 개인의 자유 및 배심원제에 의한 재판 등 원칙들이 논란 없이 확립되었다.





이것들이 가능한 이유들은 바로 거대한 중앙권위에서 권력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타운과 같은 작은 공동체들이 생겨나고 그 후에 조금씩 거대한 모습이 갖춰진 것이며 타운의 권력은 중앙권위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들의 자주성의 일부를 주에게 양보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부터 준 권력이 아닌, 각 개인 자신의 권력을 단체에 중앙에 조금 양도한 개념이 먼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권재민이고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의 환상적인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점 아니 단점이라기 보다는 불안정성도 있다. 민주주의는 합의된 독재라는 말이 있듯이 결국 어떤 헤드쿼터스가 결성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헤드쿼터스의 관심 때문에 다른 작은 대상 그리고 새로운 대상이 생겨나면 이때까지 그 전 대상에서 쏟았던 관심이 사라질 수 있는 위험이 있으며, 다수의 횡포로 인한 사상적 영향, 입법권의 횡포와 행정권의 횡포, 그리고 결국 자유로운 서로가 부딪히면서 생길 무정부주의 등 많은 민주주의의 단점들이 보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권력이 최대한 서로 견제되고, 분산되어야 한다. 삼권분립이라는 이름이 있다면 그 삼권의 수장들은 국민들이 선임할 수도 있어야 하며 간섭할 수도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견제하는 긴장된 상태가 불안하기 때문에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것이다. 서로 견제하고 긴장된 상태에서 그 권력이 감시된다면 그 권력은 최대의 공익과 복지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토크빌은 19세기 학자이다. 그러나 그의 우려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은 시대를 초월했다고 생각한다.




토크빌은 민주사회는 모든 것이 평등해지므로 그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상업과 물질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도 물질주의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또 무지한 다수에 의해 절대권력이 휘둘리게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예견 즉 무지한 다수가 지나친 평등의 추구로 인해 휘두르게 되는 민주주의가 가장 무서운 독재라고 파악한다. 그의 주장 “신(하나님)과 법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거리낌없이 말하고 행동하고 숨쉬는 기쁨” 으로서만 자유를 추구했던 토크빌은 시대를 초월한 자유와 평등을 생각하고 품었지만 그 당시의 사회에 애증과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자유를 외치게 되었다. 최근 화제의 나는꼼수다에서 말하는 쫄지마 정신이 바로 이런 정신일까?



19세기 학자의 생각은 그의 민주 사회에 대한 인식은 산업화의 확대 속에서 정신적 자유를 지키려 했던 그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다가 오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 민주주의는 우리 삶에 은연중 깔려있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을 갖고 고민해야 한다. 물론 아프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물질적 이익만을위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정치적 무관심과 물질만능의 그 놀라울 만큼의 권위 앞에 쫄지말고 고민하고 이야기해야 함을 19세기 학자 토크빌은 미리 말했고 우리는 그러한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토크빌의 이야기는 다시금 참 민주주의란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한 줄기 빛을 비춰주는 등대와도 같다고 생각된다.


_Aim High 사색하는 글쟁이 
_2011.12.22

어른들의 해야 할 일






우리는 아이들에게 전해줘야 할 교훈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내가 정의와 보편적 상식의 편에 있다면 강자의 상식에 지배당해서 비참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려줄 기회는 이제껏 모두 닫혀 있었다.


이제는 정의와 옳음을 말해야 한다.

소득의 불평등 이전에 사람 됨의 불평등을 이야기 해야 한다.


돈 많은 사람은 피부가 다이아로 된건 아니지 않은가?

정의와 보편적 상식이 무너지고 무시되는 사회라면 그것을 먼저 세워야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게 '어른들의 버킷 리스트' 아닐까?


사색하는 글쟁이 Aim High 
_ 2012.02.20 

#정의 #옳음 

집을 짓는다면?

만약 집을 짓는다면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을 올리고 싶다. 다만, 경사로를 이용해서 지하는 경사로로 건축법상 지하이지만, 건물로서는 1층이 내 집의 2층인 집으로 짓고 싶다. 층고는 높게 하고 싶다.  2층에 서도 3층같은 느낌이 나도록. 계단은...